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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유, 사랑사회문화 연구보고서 2021. 8. 25. 08:05
사랑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수많은 예술 창작 영역에서 가장 빈번히 주제로 사용되는 감정이다. 그만큼 보편적이기 때문이겠지만 그 표현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사랑을 의미하는 말에는 ‘에로스’가 있는데, 그 대상은 현대처럼 남녀 간의 사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고차원적 정신 활동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철학자 플라톤조차도)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남성들끼리의 동성애가 유행했다고 한다한편 ‘필리아’는 친구라는 뜻의 ‘필로스’에서 나온말로 성적인 욕구가 없는 사랑을 뜻했고, 친구 사이의 우정, 가족 간의 사랑, 이웃과의 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가페’는 기독교가 생긴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에로스나 필리아와 구별하여 신의 사랑을 뜻한다. 이탈리아 시인 단테가 살던 르네상스 이전 시대에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화신을 향한 이상적인 사랑을 추구했는가 하면, 셰익스피어가 활약하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교육을 받은 교양 있는 상류사회 사람들만이 사랑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이 시대에는 사랑이란 격정적이지만 짧고 병적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로미오와줄리엣>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다양한 사랑의 유형 중 현대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남녀 간의 ‘낭만적 사랑’일 것이다. 드라마, 영화, 소설 등에서 수없이 변주되어 묘사되는 ‘낭만적인 사랑’의 핵심은 신분과 경제력, 학력 등 외부적인 조건을 넘어서 독립된 남녀 개인 간의 ‘자유롭고 평등 한 동반자적 사랑’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인류가 이런 사랑을 꿈꾸게 된 것은 18세기 말 계몽주의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그리 길지 않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사랑이 계급을 초월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내적인 특성이라는 민주적인 개념이 도입되었으며, 자본주의의 발달로 탄생한 영국의 시민적 중간계급(부르주아)이 신분과 경제력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지속하여 혼인이라는 동반자 관계로까지 확장되는 근대의 ‘낭만적 사랑’을 싹트게 했다고 한다. 우리가 오늘도 열광하면서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소설에서 그 모티브를 빌리고 있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바로 그 시절 싹트기 시작한 ‘낭만적 사랑’을 주제로 한 창작물이다.
전통적으로 사랑을 다루어 온 철학, 역사, 문화와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서 21세기에는 과학과 심리학의 측면에서 사랑이 연구되고 있다. 미국의 인류학자 헬렌 피셔(Helene Fischer)는 사랑을 3단계로 구분하여 단계마다 뇌 속에서 일어나는 호르몬 변화와 함께 소개한다.
첫 번째는 이끌리는 단계로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고 호감을 느끼게 되는 소위 ‘썸’을 타는 시기이다. 이때에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이 각각 작용한다. 분자 구조가 거의 유사한 이 호르몬들은 성적인 매력을 이성에게 어필하는 데 기여한다.
그 다음은 사랑에 빠지는 단계로 짝사랑이라면 온통 상대에 대한 생각으로 다른 일에 집중하기도 어렵고 불면증, 식욕저하에 시달릴 수도 있지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커플이라면 행복, 기쁨을 느끼는 시기이다. 이 단계에서 작용하는 호르몬은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 도파민 등 모노아민계 호르몬들이다. 이시기의 뇌를 MRI로 보면 전두엽의 활성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사랑에 빠지면 상대의 허물을 과소평가하고 장점은 과대평가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한마디로 판단력이 흐려져 눈에 콩깍지가 씌는 것이다. 마지막 3단계는 함께하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애착의 단계로, 신뢰감과 강한 정서적 친밀감을 느끼도록 해주는 옥시토신이 남녀 구분 없이 분비된다. 안타깝게도 모든 사랑이 관계의 지속성과 안정감을 느끼는 마지막 3단계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결국 이 세 번째 단계를 통해 완성된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모습을 달리해 온 사랑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어떤 모습일까? 인스턴트식 만남과 이혼이 흔하다고 해도 여전히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낭만적 사랑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매혹되어 사랑에 빠진 후 ‘그래서 둘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해피엔딩 뒤에 숨겨진 이야기는 결국 애착이 얼마나 잘 이루어졌느냐에 달려있다.
사실 애착은 남녀 관계를 떠나 모든 관계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생애 초기 엄마와의 관계의 질이 많은 영향을 준다. 우리의 삶은 생애 초기의 강렬한 유대감과 친밀함을 엄마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서 찾는 여정인 셈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오만과 편견>을 넘어서 우리의 사랑이 한층 성숙해지길 기대하며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 나온 구절로 글을 마친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사랑해야 한다 .’